최초의 한류스타, 영화배우 겸 독립운동가 김염

 

안녕하세요, 와디즈 역사의 겨울아이입니다. 인터넷 서핑 중에 매력적인 남자를 발견했어요. 외모에, 집에, 가치관이 하나도 없는 남자. 오늘 소개해드릴 건 에릭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유태오를 닮은 영화배우 겸 독립운동가 김염입니다. 안녕하세요, 와디즈 역사의 겨울아이입니다. 인터넷 서핑 중에 매력적인 남자를 발견했어요. 외모에, 집에, 가치관이 하나도 없는 남자. 오늘 소개해드릴 건 에릭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유태오를 닮은 영화배우 겸 독립운동가 김염입니다.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태어난 김덕린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태어난 김덕린

금염은 1910년 4월 8일 대한제국의 한성부, 즉 지금의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김염의 본명은 김덕린인데 영화배우의 꿈을 꾸미고 불꽃처럼 살아가겠다는 다짐으로 예명을 ‘불꽃’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제중원의 학교(현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로 서양 의사 면허를 딴 김필순입니다. 금염은 1910년 4월 8일 대한제국의 한성부, 즉 지금의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김염의 본명은 김덕린인데 영화배우의 꿈을 꾸미고 불꽃처럼 살아가겠다는 다짐으로 예명을 ‘불꽃’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제중원의 학교(현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로 서양 의사 면허를 딴 김필순입니다.

아버지 김필순 아버지 김필순

아버지 김필순은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 활동을 하던 중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1912년 중국 망명을 선택, 만주의 화폐로 이주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힘을 보탰습니다. 이후 김필순은 중국 헤이룽장성 치치하르에 병원을 열어 독립군을 치료하고 독립군의 군자금을 지원합니다. 이상촌을 건설하고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김필순은 1919년 일제 간첩에 의해 독살당했고, 김염은 고아가 되어 고모부 김순애, 김규식에게 맡겨집니다. 고모 김순애는 신한청년당, 의용단, 대한애국부인회, 임시정부 활동 등 남편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분으로, 아버지 김필순은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 활동을 하던 중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1912년 중국 망명을 선택, 만주의 화폐로 이주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힘을 보탰습니다. 이후 김필순은 중국 헤이룽장성 치치하르에 병원을 열어 독립군을 치료하고 독립군의 군자금을 지원합니다. 이상촌을 건설하고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김필순은 1919년 일제 간첩에 의해 독살당했고, 김염은 고아가 되어 고모부 김순애, 김규식에게 맡겨집니다. 고모 김순애는 신한청년당, 의용단, 대한애국부인회, 임시정부 활동 등 남편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분으로,

이모 김순애 이모 김순애

삼촌 김규식은 우리가 한국사 수업에서 들었던 바로 그 유명한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여 일제강점기의 부당성을 세상에 널리 알린 분입니다. 삼촌 김규식은 우리가 한국사 수업에서 들었던 바로 그 유명한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여 일제강점기의 부당성을 세상에 널리 알린 분입니다.

삼촌 김규식 삼촌 김규식

또 다른 고모 김필례는 한국 YWCA의 창립을 주도하는 등 여성운동을 했고, 사촌언니 김마리아는 도쿄에서 조선여자유학생 친목회장으로 2.8독립선언에 관여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던 분입니다. 또 다른 고모 김필례는 한국 YWCA의 창립을 주도하는 등 여성운동을 했고, 사촌언니 김마리아는 도쿄에서 조선여자유학생 친목회장으로 2.8독립선언에 관여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던 분입니다.

고모 김필례 사촌언니 김마리아 광복 후 아버지 김필순은 건국훈장 애족장, 고모 김순애는 건국훈장 독립장, 고모 김규식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고모 김필례는 건국포장, 사촌언니 김마리아는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됩니다. 금염의 일족은 우당 이회영의 일족만큼이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명문 일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배우 김염의 탄생 고모 김필례 사촌언니 김마리아 광복 후 아버지 김필순은 건국훈장 애족장, 고모 김순애는 건국훈장 독립장, 고모 김규식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고모 김필례는 건국포장, 사촌언니 김마리아는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됩니다. 금염의 일족은 우당 이회영의 일족만큼이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명문 일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배우 김염의 탄생

김염은 이모 부부의 보살핌 아래 학업을 계속하며 영화배우의 꿈을 꾸게 됩니다. 1927년 김염은 삼촌 김규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상하이로 옮겨 영화사 기록원, 극장 검표원으로 일하며 가난한 생활을 합니다. 1929년 AAA1는 AAA2의 기록원으로 일하던 중 감독 AAA3의 ‘풍류검객’이라는 영화에 출연하지만 흥행은 실패합니다. 1932년 김염은 당시 중국 최고 여배우인 왕령옥과 함께 출연한 ‘야초한화’로 드디어 스타덤에 오르게 됩니다. 김염은 이모 부부의 보살핌 아래 학업을 계속하며 영화배우의 꿈을 꾸게 됩니다. 1927년 김염은 삼촌 김규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상하이로 옮겨 영화사 기록원, 극장 검표원으로 일하며 가난한 생활을 합니다. 1929년 AAA1는 AAA2의 기록원으로 일하던 중 감독 AAA3의 ‘풍류검객’이라는 영화에 출연하지만 흥행은 실패합니다. 1932년 김염은 당시 중국 최고 여배우인 왕령옥과 함께 출연한 ‘야초한화’로 드디어 스타덤에 오르게 됩니다.

영화「야초한화」중 영화「야초한화」중

훤칠한 키, 잘생긴 얼굴,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김염은 중국에서 가장 잘생긴 배우, 친구로 사귀고 싶은 남자 배우, 가장 사랑받는 남자 배우라는 타이틀을 획득합니다.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김염은 어느 날 갑작스러운 발표를 합니다. 멜로영화 안 찍고 이제 항일영화만 찍겠다! 훤칠한 키, 잘생긴 얼굴,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김염은 중국에서 가장 잘생긴 배우, 친구로 사귀고 싶은 남자 배우, 가장 사랑받는 남자 배우라는 타이틀을 획득합니다.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김염은 어느 날 갑작스러운 발표를 합니다. 멜로영화 안 찍고 이제 항일영화만 찍겠다!

이는 일본 스파이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김염이 어릴 때부터 마음에 품어온 독립운동을 영화를 통해 이루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금염은 만주사변(1931)이 발발하자 자신의 브로마이드를 판 돈을 독립자금으로 지원했고, 상하이사변(1932) 이후에는 구국운동에 참여해 부상병을 구호하는 등 이미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김 염는 조선인 예술가들과 교류를 하면서 그들을 돕기도 했는데, 그 중 한 명이 무용가 최승희였습니다. 1934년 영화 ‘대로’를 시작으로 김염은 40편의 항일 영화에 출연했고, 일본이 홍콩을 점령했을 때 가장 먼저 영화 ‘장길릉운’의 필름을 찾았다가 잃어버릴 정도로 김염의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이는 일본 스파이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김염이 어릴 때부터 마음에 품어온 독립운동을 영화를 통해 이루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금염은 만주사변(1931)이 발발하자 자신의 브로마이드를 판 돈을 독립자금으로 지원했고, 상하이사변(1932) 이후에는 구국운동에 참여해 부상병을 구호하는 등 이미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김 염는 조선인 예술가들과 교류를 하면서 그들을 돕기도 했는데, 그 중 한 명이 무용가 최승희였습니다. 1934년 영화 ‘대로’를 시작으로 김염은 40편의 항일 영화에 출연했고, 일본이 홍콩을 점령했을 때 가장 먼저 영화 ‘장길릉운’의 필름을 찾았다가 잃어버릴 정도로 김염의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영화 거리 중 영화 거리 중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은 금염에게 제국주의 영화에 출연하라고 강요했지만 금염은 단호히 거부합니다. 기관총으로 나를 겨냥해도 그런 영화는 안 찍겠지. 예술은 사회에 이바지해야 하며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의 힘이 되어야 한다.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은 금염에게 제국주의 영화에 출연하라고 강요했지만 금염은 단호히 거부합니다. 기관총으로 나를 겨냥해도 그런 영화는 안 찍겠지. 예술은 사회에 이바지해야 하며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의 힘이 되어야 한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금염은 참전을 결심하고 전투기 조종사 시험에 도전했다가 낙선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 최고의 영화 ‘황제’의 비참한 말로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금염은 참전을 결심하고 전투기 조종사 시험에 도전했다가 낙선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 최고의 영화 황제의 비참한 말로

1945년 조선이 해방되면서 가족들은 조선행을 택했지만 금염은 중국에 남습니다. 미국에서 영화 ‘대지’의 왕롱 역을 제안했지만 김염은 거절합니다. 왕릉 역은 미국 백인 배우 폴 무니가 얼굴에 노란색을 칠하고 중국인 행세를 하며 출연합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순수 예술가임을 고집하던 김염은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습니다. 같은 해 김염은 동포들을 위해 조선인동포협회를 조직하고 조선인학교를 후원합니다. 위 질환을 앓던 김염은 1962년 의료사고로 신경이 절단돼 영화계를 은퇴합니다. 1945년 조선이 해방되면서 가족들은 조선행을 택했지만 금염은 중국에 남습니다. 미국에서 영화 ‘대지’의 왕롱 역을 제안했지만 김염은 거절합니다. 왕릉 역은 미국 백인 배우 폴 무니가 얼굴에 노란색을 칠하고 중국인 행세를 하며 출연합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순수 예술가임을 고집하던 김염은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습니다. 같은 해 김염은 동포들을 위해 조선인동포협회를 조직하고 조선인학교를 후원합니다. 위 질환을 앓던 김염은 1962년 의료사고로 신경이 절단돼 영화계를 은퇴합니다.

중년의 금염 중년의 금염

문화대혁명이 불었던 1966년 커피와 버터를 좋아했던 김염은 반혁명 양파 분자로 매도당해 수용소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하고 건강이 악화됩니다. 이후 금염은 폐기종 등 합병증에 시달리다 1983년 12월 27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염은 두 번의 결혼을 했는데 첫 번째 배우자는 배우 왕인미, 두 번째는 배우 진이였습니다. 친이와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는데 문화대혁명 시기에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분열을 앓다가 2007년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문화대혁명이 불었던 1966년 커피와 버터를 좋아했던 김염은 반혁명 양파 분자로 매도당해 수용소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하고 건강이 악화됩니다. 이후 금염은 폐기종 등 합병증에 시달리다 1983년 12월 27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염은 두 번의 결혼을 했는데 첫 번째 배우자는 배우 왕인미, 두 번째는 배우 진이였습니다. 친이와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는데 문화대혁명 시기에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분열을 앓다가 2007년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왕인미와 금염 왕인미와 금염

김염과 친이 김염과 친이

중국 최고의 영화배우로 성공한 후 자신의 명성을 부의 축적이 아닌 조국 독립을 향한 항일운동을 위해 바친 김염이라는 배우가 아닌 독립운동가를 이제야 알게 된 것이 미안할 따름입니다. 중국 최고의 영화배우로 성공한 후 자신의 명성을 부의 축적이 아닌 조국 독립을 향한 항일운동을 위해 바친 김염이라는 배우가 아닌 독립운동가를 이제야 알게 된 것이 미안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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